[강준모의 詩로 세상열기] '환절기' (박준)

김애령 기자 | 기사입력 2020/11/16 [17:37]

[강준모의 詩로 세상열기] '환절기' (박준)

김애령 기자 | 입력 : 2020/11/16 [17:37]

 

▲ 그대와 함께 보낸 시간들은 이렇게 아픈 모양입니다. 환절기가 되면 전두엽의 서랍들이 축농(蓄膿)처럼 곪았던 삶의 기억들을 한 두 개는 꺼내는 계절인 모양입니다. (본문 중에서)



  - 환절기 (박준)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 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비린 것을 먹지 못하는 당신 손을 잡고 시장을 세바퀴나 돌다보면 살 만해지는 삶을 견디지 못하는 내 습관이나 백도를 황도라 말하는 당신의 착각도 조금 누그러 들었다

 

 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일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시평(詩評)
 그대와 함께 보낸 시간들은 이렇게 아픈 모양입니다. 환절기가 되면 전두엽의 서랍들이 축농(蓄膿)처럼 곪았던 삶의 기억들을 한 두 개는 꺼내는 계절인 모양입니다.

 

 환절기에는 그래서 술잔을 천천히 기웁니다. "배가 지나 온 뒤의 광경들"이 쉽게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백도를 황도라 말하는" 그대의 고집도 이렇게 가슴 한 구석으로 수용되는 계절입니다.

 

 그때는 말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을 찾아 중앙시장을 돌면, 갈매기가 비린내를 물어다 떨구던 그 여행의 끝물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환절기에는 서랍 속의 기억들이 심한 일탈 증세를 보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 시는 철학도 윤리도 수기도 아닌, 우리가 지낸, 놓치고 싶지 않은, 계절 사이에 놓인, 슬픔의 포트폴리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강준모 시인
1961년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및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7년 [창작21] 신인상 등단. 시집 <오래된 습관> 공동작품집 <발톱을 깎다> <수상한 가족사> <드문드문 꽃> . 창작21작가회 사무국장. 현재 경희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 재직 중.

 



 

30년간 고등학교에서 윤리교사로 교육활동을 한 후 명퇴하고, 지금은 그 동안의 교육활동을 성찰하며 교육의 공공성에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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