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천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3]

용석춘 기자 | 기사입력 2021/01/17 [14:54]

홍천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홍천읍지 이야기3]

용석춘 기자 | 입력 : 2021/01/17 [14:54]

 홍천에는 어떤 인물들이 있었을까?

 

▲  태조 이성계가 용희수에게 보낸 제문( 龍希壽 緖之子 檢校工曹判書太祖有祭文 ) 홍천군 몽면 덕치리  ©용석춘 기자

 


홍천읍지를 읽다보면 제법 친근해지는 사람들이 있다김효성(金孝誠)이 그렇고윤번(尹璠)이 그렇고용득의(龍得義), 용희수(龍希壽), 심희수(沈喜壽)가 그렇다.

 

13개의 홍천읍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은 김효성이다무려 10개의 읍지에서 김효성을 만날 수 있다사람을 기록하지 않은 세종실록지리지관동지대동지지를 제외하면 모든 읍지에 기록된 사람이다.

 

사람이 나오는 항목은 寓居(우거), 名宦(명환), 人物(인물), 名官(명관), 仕宦(사환등이다명환인물명관사환은 벼슬을 지낸 명망 있는 사람을 말한다우거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정착하지 않고 임시로 머물러 사는 것을 말하지만대개 노년에 풍광 좋은 곳에서 은거하는요즘 말로 얘기하면 은퇴 후 즐기는 전원생활’ 쯤으로 생각해도 될 듯 싶다.

 

▲   김효성의 묘  북방 하화계리 능뜰공원 내   ©용석춘 기자

 

 

김효성은 북방면 화계리에서 우거했다신증동국여지승람의 우거(寓居)항목에 처음 등장한다. 

 

조선 김효성세종 때 여러 번 장수를 지냈다후에 정난공신이 되었다연산군에 봉해졌다.1’ 김효성이 말년에 홍천에 기거했음을 적고 있다공작산에 태를 봉안한 정희왕후의 지아비였던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란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 정난공신에 올랐다.

 

동국여지지에서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조선 김효성연안 사람이다장헌왕 때 여러 번 장수를 지냈다후에 정난공신이 되었다연산군에 봉해졌다관직은 공조판서에 올랐다시호는 양효다.2’ 마지막 관직이 공조판서였다장헌왕은 세종이다.

 

혼란스러움은 여지도서부터이다여지도서』 적힌 김효성에 관한 글이다.

 

김효성현의 서쪽 5리쯤 화계에 살았다세종 때 여러 번 장수를 지냈다후에 정난공신이 되었다연성군이다.3’ 북방면 화계리에 우거했음을 구체적으로 적었다혼란스러움은 연산군이 연성군으로 바뀐 점이다뒤를 이어 발행된 화산현지홍천현 읍지 백운정사 필사본관동읍지』 『홍천군읍지』 등이 여지도서의 연성군을 따랐다홍천현읍지는 이런 상황이 혼란스러웠는지 을 공란으로 남겨뒀다. ‘이 아닌 으로 잘못 적었다.

 

홍천읍지와 강원도지에 와서야 연산군으로 돌아왔다. ‘김효성연안 사람이다무인으로 병조판서에 올랐다단종 계유년에 정난원공에 오르고 연산군에 봉해졌다승록대부에 올랐다서울에서 내려와 우거했다시호는 양효다.4’ 강원도지에 실린 내용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연산군으로 기록되어 있다먼 길을 돌아 연산군으로 정착한 것이다김효성은 말년에 홍천 북방면 화계리에서 살다가 능평리에 묻혔다북방면 능평리 능뜰 근린공원에 김효성의 묘가 있다.

 

김효성 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사람이 윤번이다. 7개의 홍천읍지에 기록되어 있다윤번에 관한 기록은 짧다. ‘本朝 尹墦 爲縣監조선윤번현감을 지냈다.’ 윤번은 정희왕후의 아버지다정희왕후는 세조(수양대군)의 왕비다홍천읍지 여러 권에 정희왕후의 태를 공작산에 모셨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孔雀山 安貞熹王后胎

 

 

▲  홍천남면 금학산 수태극(용득의 문하시중이 금학산에 용수사, 학명루 지어)   © 용석춘 기자

 


다음으로 많이 기록된 사람은 용득의용희수심희수이다모두 5개의 홍천읍지에 소개되어 있다. ‘고려용득의홍천사람이다문하시중에 삼태사에 올랐다.5’ 용득의는 팔만대장경 제작을 총지휘한 사람이다말년에 금학산에 용수사와 학서루를 지었다고 전해지지만 위치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홍천 용씨(龍氏)의 시조다.

 

용희수는 용득의의 5세손이다. ‘용희수용서의 아들이다공조판서를 지냈다태조의 제문이 있다.6’ 용서(龍緖)가 용득의의 4세손이므로7용희수는 5세손이 된다태조의 제문 원본은 6.25 때 소실되었지만 제문의 내용은 동면 덕치리 홍천 용씨 사당(화산제현판에 남아 있다인터넷은 물론 2018년 홍천군지에 용희수가 용득의의 6세손으로 되어 있지만 홍천읍지 기록은 5세손이다.

 

심희수 역시 기록은 짧다. ‘沈喜壽 號一松 官議政 심희수호는 일송의정에 올랐다.’ 의정은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말한다심희수는 그의 나이 33살이었던 1580년 7월 28일 홍천 현감으로 부임해, 1582년 11월 25일 퇴임했다.8

 

 

▲    서면 한서 남궁억 선생 기념관

 


강원도지에서 귀에 익은 인물이 등장한다남궁억과 이항로이구다남궁억은 명류(名流이른바 유명인사 요즘 말로 셀럽((Celebrity) 항목에 기록되어 있다. ‘남궁억호는 만산이고 함열 사람이다간의민의 후손이다성품이 탁 트였고밝고중후하고우아하며속이 깊고 마음이 넓었다가문의 후광(蔭敍)으로 참봉을 지냈다일찍이 칠곡 군수를 맡아 다스렸다치적이 많아 선정비가 세워졌다위암 장지연과 함께 황성신문사를 세워 붓을 잡았다신문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만년에는 시골마을로 돌아와 홍천서면 모곡에 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수백 편의 문집을 남겼다.9’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탓에 독립운동과 무궁화 보급 운동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시골마을은 서면 보리울이다.

 

이항로는 강원도지』 우거(寓居)에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항로호는 화서이고 벽진 사람이다평정공 약동의 후손이다성품이 대쪽 같고 강직했으며 언행에 거침이 없었다성리학을 공부했으며 이조참판에 천거되었다정조 때에 유생들의 상소에 직언을 많이 했다순조 때에 양근(양평)에서 와 외삼포에서 우거를 시작했다후학들을 가르치는데 힘썼다제자로 면암 최익현중암 김평묵성재 유중교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이며 유집이 있다.10

 

이구는 능묘(陵墓항목에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판결사 이구의 묘홍천면 결은리 사동 정남향에 있다대사헌 유색이 묘갈 글을 지었다.11’ 묘비(墓碑)는 지붕모양의 덮개돌이 있는묘갈(墓碣)은 지붕 모양의 덮개돌이 없는 비석을 말한다이구는 본인이 지은 사미정(四美亭)에 올라 홍천강을 바라보며 차 한 잔 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이른바 한송재 김기도가 지은 화산 8’ 중의 하나인 미정자애(美亭煮艾 사미정에서 차를 다리다.)’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많은 인물들이 노년에 홍천에서 우거를 했다그들을 사로잡은 게 이구 가 말한 사미(四美)일지도 모른다사미는 좋은 때(良辰), 아름다운 경치(美景), 완성하는 마음(賞心), 즐거운 일(樂事)이다예나 지금이나 노년에는 풍광 좋은 곳에서 차 한 잔 우려내 마시는 즐거움이 으뜸인 듯 하다.

 

 

1. 本朝 金孝誠 世宗朝 屡受閫寄 後爲靖乱功臣 封延山君신증동국여지승람

2. 本朝 金孝誠系出延安 莊憲王朝 屡受閫寄 後爲靖難功臣 封延山君官至兵曹判書諡 襄孝동국여지지

3. 金孝誠 居縣西五里許花溪 世宗朝 累受閫寄 後爲靖難功臣 延城郡여지도서

4. 金孝誠延安人 武科 官至兵判 端宗癸酉 錄靖難元功 封延山君 陞崇祿自京來寓 諡襄孝강원도지.

5. 高麗 龍得義 洪川人 官領三台事여지도서』 

6. 龍希壽 緖之子 檢校工曹判書太祖有祭文홍천현 읍지백원정사 필사본』 

7. 龍緖 得義之四世孫 本朝 龍城府院君홍천현 읍지백원정사 필사본』 

8. 沈喜壽 庚辰七月二十八日到任壬午十一月二十五日辭狀遞去號一松 官止右相화산현지

9. 李朝 南宮檍 號晩山咸悅人諫議敏后踈曠典雅沉弘有量蔭參奉嘗宰漆谷治化大致 有善政碑與偉岩張志淵刱皇城新聞社自秉筆 有新聞自此始晩年歸鄕里 築毛谷學校 獎勵後進盡力敎務有遺集數百篇강원도지

10. 李恒老 號華西 碧珍人平靖公約東后性簡亢少許潛心性理之學以逸薦吏參判正祖朝 儒疏多直言純祖朝 自楊根始寓外三浦 獎進後學門人有 勉菴 崔益鉉重菴 金平黙省齋 柳重敎 等諡 文敬 有遺集강원도지

11. 判決事 李龜墓在洪川面 決隱里 寺洞 子坐大憲柳穡 撰墓碣銘강원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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