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송경진 누명 자살 사건, '사과는 민주시민교육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문채병 은퇴교사의 교육이야기 1

한용철 기자 | 기사입력 2020/08/1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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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 송경진 누명 자살 사건, '사과는 민주시민교육을 위해서라도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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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약방문에 불과하지만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부채의식을 안고 다시 한 번 송경진 선생님을 애도합니다. 진정한 사과를 촉구한다. 지금도 많이 늦었다' (본문 中)

학생 8명을 포함 전체 학생 19명뿐인 부안의 작은 중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던 송경진 교사는 지난 2017년 8월 5일 자택에서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제자들을 성추행했다는 의혹으로 신고 이튿날부터 출근 정지를 당한 송 교사는 그해 4월 24일부터 7월 24일까지 석 달간 직위해제 상태로 지냈다. 이에 대해 경찰이 '무혐의 처분'을 내렸는데도 전북교육청에서 징계 절차를 밟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세상을 떠난 지 약 3년 만에 법원이 송 교사의 죽음을 '공무상 사망(순직)'으로 인정하였다. 곡절 많은 세월이었다. 교육가족의 가슴에 후빈 상처와 난제로 남긴 불편한 사건이다. 인권의식의 현주소와 민주시민교육을 다시금 돌아봐야 할 것이다. 거칠지만 몇 가지 단상으로 경종을 삼고자 한다.

 

문채병 은퇴교사

 첫째, 자기 중심적 인권에서 인간관계 차원의 인권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인권을 한자로 표기하면 人權이다. 사람 人자는 ‘사람’이라는 대표명사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주로 타인을 지칭한다. 1인칭인 나를 가리키는 한자어로는 대개 己(몸기)자를 사용한다. 권세라는 權자 속에 저울, 균형, 중용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인권이란 배타적으로 나의 권리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인간관계 속에서 타인의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말로, 균형과 중용을 중요한 가치로 삼는다. 자기중심적, 폐쇄적 닫힘이 아닌 타인과 세상을 향한 배려, 공감, 사랑과 자비로 발현되는 나눔과 배품이어야 한다. 인권 용어에 대한 개념만큼은 민주 시민성에 기반 해야 할 것이다.

 

 혹여, 인권이라는 명분으로 타인의 기본권을 훼손하는 흉기로 변통된다면 이보다 더 막막한 일도 드물 것이다.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마저 인권 반대론자로 낙인찍히는 제물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인권이 권력의 소모품이나 장식품으로 전락되는 것을 반드시 막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인권을 악용하는 미숙함으로 인하여 폐해가 창궐한다. 부처님 말씀이 어디 한 곳 틀린 것 없지만 부처님 말씀을 팔아 부당한 사익을 챙기는 땡초가 문제이듯.

 

둘째, 엄연한 사실마저 부정하는 이분법적 흑백 진영논리를 타파해야 한다.
 흑백논리 망령은 송경진 누명 자살 사건에서도 어김없이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의심을 일체 용납하지 않으면서 자기 확신 편향으로 흑백 맹신을 공고히 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직격탄을 날린다. 시민들로 하여금 사실을 사실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고, 바른 소리조차 듣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우민화 술책이었다.


 한마디로 전북학생인권센터의 잘못된 운영 방식에서 야기된 문제였다. 과오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사과를 전제로 개선이 요구되는 절대적 과제이다. 진솔한 문제제기까지 교육감 선거와 관련한 네거티브로 규정하면서 권력 싸움으로 격하시키기에 급급한 지금의 전북교육권력자들의 천박성에 건강한 목소리는 묻히고 말았다. 반면에 또한 학생인권에 대한 깨알만큼의 인식이나 관심도 없는 보수 참칭 난봉꾼들이 학생인권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인권센터와 인권조례 폐지를 요구하는 것 역시 한참 빗나간 과녁이다. 권력추구 독화살일 뿐이다.

 

 흑백 진영논리는 상대의 존재만으로도 혐오나 증오를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상대와 맞선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자신을 향한 모순은 은폐되고, 면죄부를 얻게 되는 것을 넘어 대안으로까지 부각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 겉으로는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심 서로의 존재를 즐기는 유령들의 핑퐁장난이다.

 

셋째, 궤변을 뚫어보는 민주시민교육이 절실하고 이를 공유하는 교육적 소통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궤변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속임수이다. 도리(道理)가 아닌 말을 도리에 맞는 것처럼 억지로 공교(工巧)롭게 꾸며대는 말이다. 말이 어긋나면서 거짓과 꾸밈이 화려해진다. 흔히 사용되는 수법은 관계를 왜곡하여 대비시키는 교묘한 꾸밈이다.
 
 송교사가 무죄라면 학생들이 무고죄가 된다는 논리로 송교사를 압박했다는 이야기는 궤변의 해악이 어떤 결과로 내몰았는지 섬뜩한 상흔이다. 교권이 죽어야 학생인권이 산다는 식으로.... 인권을 중시하면서 교권을 경시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인권은 교권의 반대어가 아니다. 교권이 누락된 인권은 거짓이다. 학교인권을 중시하는 사람은 교권을 존중하고 학생인권을 사랑해야 정상이다. 인권과 교권은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황당무계한 가설을 내세워 어깃장을 놓음으로써 딜레마로 만들어 버리는 수법도 상투적 기교이다.
“형사처벌을 받지 않더라도 교육자로서 도덕적 책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는 주장은 ‘도덕적 책임’이라는 인위적 가설을 만들어 선택 딜레마 프레임으로 몰아넣는다. 어디 그뿐이랴? “설사 성추행 문제에 혐의가 없다고 하더라도 징계법상 징계사유가 있는데 이것을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가 될 수 있다.” 거나 “한 인간으로서 사망, 교사로서 사망 거기에 대한 인간적 아픔과 법적인 책임 여부는 별개다” 등 주장은 허황된 가설로 어깃장을 놓는 것에 불과하다. 도덕적 책임? 징계사유? 법적 책임을 가설로 내세우고 있지만 어느 것 하나 구체적으로 입증하고 있지 않다. 가설은 검증을 위한 가정일 뿐인데도 합리적 진실인 양 말하는 말본새는 속임수 궤변이라는 반증이다.

 

 송경진 누명 자살 사건을 두고 말들이 많았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말로써 진실을 호도하거나 왜곡하면 안 된다. 말은 진실을 추구하고, 일이 바르게 정립되도록 기여해야 한다.


 일찍이 공자는 “말을 잘 꾸미고 얼굴빛을 좋게 하는 사람 가운데 어진 이가 적다.”라고 하여 궤변을 질타했다. 또한 논어 마지막 구절은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여, 천명과 예에 못지않게 말을 알아차리는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민주주의를 유지하려면 실상(實狀)이 풍문에 묻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민주시민교육에서 ‘말교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진실에 대한 시인과 잘못에 대한 사과는 ‘말교육’의 정수이고 첫걸음이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에 불과하지만 남아있는 사람으로서 부채의식을 안고 다시 한 번 송경진 선생님을 애도합니다. 진정한 사과를 촉구한다. 지금도 많이 늦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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